누가 진정한 성도인가?

요한일서 1:1-4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목사님께서 여행 중 이십니다. 때문에, 이번주와 다음주 2주에 걸쳐서 제가 목사님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형제 자매님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많이 모자라기만 합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신 말씀을 함께 할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또 이 말씀을 전할 때에 저의 인간적인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 그래로를 전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오늘과 다음주 두번에 걸쳐서 함께 나누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일서 1장입니다.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으로 사도 요한은 총 5권의 하나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복음서 중의 한권인 요한 복음, 자신이 사목하던 교회들에게 보낸 3편의 편지, 흔히들 요한일서, 2서, 3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기록한 요한 계시록, 이렇게 5권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기록한 요한 복음을 저술하도록 하시고, 또 모든 비밀의 마지막인 계시록까지도 저술하도록 허락하신 것을 보면, 사도 요한은 열두 사도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을 받았던 제자였음이 분명합니다. 스스로도 기록하기를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라고 불렀고,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도 사도 요한이 가진 예수님과의 가까운 관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공부할 요한일서, 그리고 요한2서 3서에는 저자의 이름이분명하게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역사를 통해서 이 글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논란이 없습니다. 아마도, 글을 쓰는 사람이 사도 요한이라는 것을 굳이 적지 않더라도 당시 교회의 성도들 입장에서는 이 편지를 누가 썼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말씀 여러 곳에서 사도 요한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선 사도 요한은 세베대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자신의 형인 야고보와 더불어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열두 제자중의 한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 형제에게 우레의 아들이라고 직접 이름지어 주셨다고 마가복음 3:17절에 나옵니다. 우레는 Thunder 천둥을 뜻합니다. 아마도 이들 형제가 한 성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형인 야고보 그리고 사도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님에게 가장 신뢰를 받은 제자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을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이나 2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실 때에 이들만 따로 데리고 가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스스로를 칭하기를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 사랑하는 자였냐 하면,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누워 있을 정도였다고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 합니다.
o 요한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저자 연대

요한일서에는 연도를 추측할 수 있는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사도 요한이 에베소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한 1세기 후반부 (AD 90-95년)를 저작 연대로 봅니다. 나이로 치면 80세를 넘긴 때였습니다.


배경 – 영지주의 거짓교사들

사도들이 쓴 다른 편지들, 예를 들면 로마서, 갈라디아서, 베드로 전후서, 야고보서 등등을 보면, 사도들의 편지 서두에는 문안 인삿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는 그런 인삿말이 없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그만큼 사도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큰 긴급하게 다루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너무가 우려하고 걱정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영지주의라는 거짓된 가르침이 초대 교회안으로 침투하여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현상입니다. 바로 거짓교사들이 잘못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잘못된 믿음으로 유혹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현대교회들이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날 이상한 방향만 추구하는 교회들이나 목자들이 많은 현실을 고려할 때에, 초대교회이 정신을 배우자는 노력은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잘못된 방향으로 가르치는 거짓교사와 거짓교리의 문제는 현대 교회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도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 안에서 퍼지고 있던 ‘영지주의 (Gnosticism)’은 AD 1-3세기에 그리스와 로마 문화권에서 유행했던 철학적, 종교적 사상입니다.  영지주의라는 명칭은 헬라어 '노스티코스'에서 유래합니다.  여기에서 “노시스”라는 말은 “비밀스러운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 번역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말하기를, 자신들은 비밀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또 비밀을 알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영지주의들은 또 주장하기를 특별한 지식을 소유하여야만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소위 접신론적인 운동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교회 역사상 이러한 영지주의는 전통적으로 이단으로 치부되어 왔고 또 교회안에서 배척하여야 할 사상으로 공표되어 왔습니다.
영지주의는 사도들의 가르침 -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한 신앙 교육이나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 소위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이나 깨달음으로 뭔가 신비한 계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적인 신적 계시, 뭔가 특별할 경험에 의해 얻어지는 비밀을 깨달아야 구원의 길이 열린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을 영과 육으로 나는 2분법, 또는 영, 육, 혼이라는 삼분법으로 억지스럽게 이해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좋고 선한 것이고, 육적인 것은 나쁘고 악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당시 철학과도 영향을 주고 받는데, 예를 들면 육적인 것은 나쁘기 때문에 육체의 쾌락을 죄악시하는 금욕주의와 연결됩니다. 대표적인 사상이 스토아 학파입니다.

더 나아가, 금욕주위와는 정반대인 쾌락주의로도 발전하게 되는데, 이 때의 논리는 우리의 구원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육적으로는 어떤 식으로든지 살아도 무방하고, 때문에 이왕이면 고통이 없는 평정 (아타락시아)를 추구하자라는 주장입니다. 대표적인 학파가 에피쿠로스 학파입니다.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졸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그리 낳설지 않은 용어들일 것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이 우주를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악한 신과 선한 신의 공존 그리고 대립, 혹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선한 세상과 사탄이 주관하는 악한 세상이라는 식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한 절대자이자 주권자시라는 것을 부인하였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어느 정도 존경할 만한 '영적인 권능' 정도로 이해한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만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부인합니다.

소위 가현설(Docetism)이라는 주장입니다. ‘가현 (假現)’이라는 말은 가짜로 눈에 보인다는 의미인데,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체로 오셔서 우리안에 함께 생활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환상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인 예수님은 환상인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마리아를 통해서 나지도 않으셨고,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도 하지 않으셨고, 심지어 먹고 마실 필요도 없고, 또 고통도 느끼지 않으셨고 십자가에서 죽지도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죽지도 않으셨으니 당연히 부활하실 필요도 없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 없이 그냥 환상으로만 오셨으니, 결국 과학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 공생애, 고난당하심, 그리고 부활하심 등의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모두 부인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영지주의는3-4세기 이후에는 급격하게 쇠퇴하며 무너지게 됩니다.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상 영지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도 소위 이단이라고 불려지는 곳에 의하여 아직도 계승되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신적계시 - 즉 자신들의 주관적이며 특별한 지식을 알아야만 거듭나며 구원을 받는다는 집단은 영지주의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이단들은 특히 창세기, 계시록등을 독단적으로 해석하면서 그것이 신적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인간의 육체를 물질화, 죄악시하여, 오직 영혼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금욕주의와 특별히 사람이 살아서도 육체와 영혼을 분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소위 영혼의 육체이탈설을 주장하는 일련의 주장등은 헬라주의적인 영지주의 견해와 유사합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도 스스로 크리스챤이라고 칭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실들도 거듭났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안에서 다른 성도들 틈에 섞여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주장들을 교묘하게 펴 나갑니다. 겉으로 봐서는 이사람이 과연 진짜 거듭난 성도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 포괄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진리가 진리이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포교와 전도, 그리고 교세 확장이라는 명목하에 자칭 타칭 크리스챤이라는 사람들이 진리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조차 묻지 않습니다. 그저 오기만 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교인 카드만 작성하면 크리스챤이라는 식입니다.

그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챤인지 아닌지 진지하게 분별하지 않고, 다만 일요일에 출석하고, 어느 정도 어울리면 그냥 성도라고 말하고 형제 자매라고 말합니다. 신자카드를 적어 냈거나, 예배 후반부에 ‘오늘 영접하신 분들’ 일어나라고 했을 때 일어 나거나, 영세 또는 세례 의식을 거치면 두말없이 성도라고 불러 줍니다. 감히 판단하지 않으려 하고 분별하지 않으려 합니다. 교회 밖에서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 삶을 살더라고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이 어떠한 교리와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도 상관 없습니다. 그냥 형식만 갖추면 성도라고 불러 줍니다. 이것이 과연 옳바른 현상입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인들은 너무 잘난 척하고, 또 남을 판단하려 한다고 말입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포용해야지,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고 경계한다고 말입니다.
그럴듯한 지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격이 한명도 없고, 때문에 자격없는 우리가 남을 판단한다는 것도 월권행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형제자매님…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임을 기억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독생자 아들을 위해 창조전부터 예비하신 순결한 신부임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일부러 더럽히거나 혼탁하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순결한 성도들의 교회가 되기 위해 순종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와, 믿음안에서 한 형제가 된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부정하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자의 권세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권세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생인지,  거듭난 성도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분별하지 않는다면,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에서 활보하도록 놔 둔다면,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많은 성도들은 스스로의 믿음과 구원에 대해 흔들릴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거짓 가르침을 쫓아서 교회에서 나갈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쓰면서 문안인사도 물을 틈이 없이 급한 마음에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옳바른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응급 처방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80이 넘은 노구의 몸으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한명이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테스트 – 누가 진정한 성도인가?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전체를 통해서 누가 과연 진정한 성도인가에 대해 네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반복적으로 가르칩니다. 네가지 기준 중에서 앞의 두가지는 교리에 관한 것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옳바로 고백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세번째와 네번째 기준은 거룩한 성도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미워하시는 사랑에 따라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네가지 질문을 요한일서 전체를 걸쳐서 네번 반복하여 묻습니다. 노파심일 수도 있겠지요. 했던 말을 하고 또 합니다. 그것도 네번이나 합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모호해 지고, 진실이 흐릿해 지는 오늘날, 교세확장에 급급하여 세상과 타협하는 교리와 검증되기 어려운 주관적 신앙고백에 만족하는 교회, 신자수를 늘리고 교회 건물을 확장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교회에 가장 필요한 말씀이 요한일서 일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어떤 목사님은 요한일서를 가르켜 현대 교회에 가장 필요한 Anti-toxin 해독제라고 말합니다. 그 해독제의 첫번째 처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옳바른 신앙 고백입니다. 요한일서 1:1-4절의 말씀입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 즉 예수님은 실제 인간이 아니셨고 어떤 환상의 일종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사도 요한은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증거로 반박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러주신 때부터, 예수님 바로 옆에서 직접 듣고, 눈으로 보고, 자세히 보고, 또 손으로 직접 만져 봤다고 증언합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가 듣고, 보고, 만질 수 있는 인간의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또, 사도 요한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가’ 즉 여러 사람이 함께 듣고 보고 만져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냥 스쳐지나가듯 본 것도 아니고 자세히 돗보기로 들여가 보듯이 살펴 보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후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있던 열한명의 사도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24:37-39절의 말씀입니다.


o 누가복음 24: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수님은 환상이 아니고 진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진짜 죽으셨고, 또 진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 예수님께서 만약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의 부활을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은 시간낭비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죽지 않으셨다는 말은, 우리가 여전히 죄의 종이고 하나님 앞에서 정죄을 받을 죄인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도 부활의 희망이 없게 됩니다. 영생의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한평생 살다가 죽으면 그만인 것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요한은 내가 직접 보고 만져 봤다고 강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생과 구원이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증언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단순히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로 오셨다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기쁜 소식,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옳바로 믿어서 새 생명을 받는 복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o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o 요한일서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우리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세상적 삶을 살더라도 영적으로는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이 영적으로 죽어있는 육체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화평해지고 영적으로 새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마다 새롭게 거듭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기적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o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보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영원한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을 믿으십시오. 예수님께서 형제 자매님 한분 한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기꺼이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이고, 초대교회때 부터 오늘날까지 우리가 드리는 신앙고백입니다.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2절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한 직접적 체험을 계속 증언합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들 가운데로 오셨음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이시며 동시에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기 전부터, 즉 창세 전 아버지와 함께 하실 때부터 예수님 안에 있어 왔습니다. 이에 대해 마가복음은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o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믿는 순간에 영원한 생명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태초 전부터 계신 아들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o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o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o 요한일서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영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o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o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3절에서의 ‘사귐’은 인간적인 사교 (Social relationship)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3절에서 사도 요한이 자신의 편지를 읽는 독자들에게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옳바로 알고 믿는 믿음 안에서 영생을 함께 누리는 복음의 형제자매로 교회안에서 교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성도간의 교제입니다. 또, 성도간의 교제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때에만 가능합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교제하는데 망설임이 없습니다. 또 거룩한 성도간의 교제는 곧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깊게 하고, 교회안에서 기쁨이 충만하게 합니다.

우리가 다른 형제자매들과의 관계에서 질시, 의심, 비판, 불신, 또는 이기적인 언행을 삼가해야하는 이유입니다. 교회안에서 성도간의 교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도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때문에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삼가해야 합니다.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육신으로 우리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말씀이시고 영원한 생명이심을 믿으면 (1,2절), 성도간의 교제,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고 (3절),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4절).

기쁨은 거룩한 성도가 누리는 복입니다. 기쁨은 하나님과의 화평한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기쁨은 하나님에게서 비롯합니다.


o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o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세상사 속에서 행복한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주위의 환경과 사건들에 영향을 받는 세상적인 사건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진정으로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해주시는 성도의 특권입니다.

o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로마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한 믿음 안에서 모든 기쁨과 평강 그리고 소망을 가지라고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찬송드리는 하나님이야 말로 기쁨이 넘치는 모든 소망, 즉 구원과 영생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영원한 소망과 기쁨과 평강을 가질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매일 가지는 성령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과 기쁨과 평강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령님과의 교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합니까? 초대 교회 이후,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성령님과의 교제는 바로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 말씀은 성령님을 통해서 쓰여졌고,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나가시기 전, 슬퍼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가신 후, 보혜사 성령님이 대신 오실 것이고, 성령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바로 성경을 통해서 입니다.


o 요한복음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사도 요한의 때에는 영지주의에 빠진 거짓 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였고,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혼란스러워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은 전하지 않고, 자신의 말로 성도를 현혹하는 거짓 선지자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모두 밝히셨습니다.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옳바른 경배를 드리고, 또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옳바로 믿기 위해서는 성경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함께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왜 우리의 구세주 이신지, 우리가 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우리고 왜 교회 안에서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과 이단을 경계하고 교회 밖으로 쫓아내야 하는지,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사는 것이 합당한지를 알게 됩니다.

성경을 모르면 흔들리기 쉽습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또 우리 마음안에 새기지 않으면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때에만, 우리는 옳바르고 건전한 신앙관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만 ‘누가 과연 진정한 성도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이 나타났을때, 성경의 말씀에 기초해서 옳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나눈 요한일서 1:1-4절의 말씀은 이 판단을 위해 사도 요한이 제시한 네가지 테스트 중에서 첫번째 입니다.

네가지 테스트를 다시 정리하면, 첫번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옳바로 알고 있는가? 두번째,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또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세번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번째,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미워하시는 사랑을 우리의 삶속에서 실천하고 있는가? 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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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어설교
    Korean Sermon
  2. 영어설교
    English Sermon
  3. 목사님과의 대화
    Dialogue with Pastor
slogan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장 58절)

"Therefore, my dear brothers,
stand firm.
Let nothing move you.
Always give yourselves fully
to the work of the Lord,
because you know that
your labor in the Lord is
not in vain."
(I Corinthians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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