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3-16: 배교에 대한 경고 (히 6:1-9).
서론: 지난 주일에는 히 5:8-14을 본문으로 해서 ‘장성한 자’ 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순종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이기 때문에 믿은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정상적이 성장과정입니 다. 믿은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얼마간 젖을 먹고 자랍니다. 젖은 다른 사람이 소화한 것을 간접적으로 섭취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주로 설교나 다른 사람이 성경에 대해 말하는 이론 같은 것들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방법을 통해 믿음이 성장합니다. 그 때가 되면 설교는 약간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설교가 교회의 목표와 방향제시 등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설교를 통해 가끔 자신이 못 깨달은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대체적으로, 장성한 사람은 싱앙생활에 있어서 설교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많은 세월 이 흘렀어도 스스로 말씀을 읽고 공부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정상적인 성장을 하기 힘듭니다. 말씀을 일고 공부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정상적 으로 이루어지고 자신의 영적 모습을 잘 볼 수 있게 됩니다.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 유익을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의 본문은 히 6:1-9입니다. 상당히 논란이 되는 구절들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구원의 본질과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에 대해 다시 생각하 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심 (1-3): 1-2.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읽고 공부하면 복음의 초보에 대해 다시 다른 사람에게 배우거나 회개와 믿음과 세례와 안수와 부활과 심판에 대해 다시 기초를 닦을 필요가 없고 그 복음의 기초를 넘어서서 장성한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1절에서 “버리고” 라는 단어는 내다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고 “떠나간다” 라는 의미입니다. 3. 그런데 그 성장의 과정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됩니다. 그러고보면 믿음의 성장도 하나님의 축복임을 다시 알 수 있습니다. 그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겠구나 하는 바램과 의지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되는 성화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이루어 지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깨 닫고 난 다음에 말씀이 읽고 싶고, 그 읽고 배운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복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 런 마음이 생기는 사람은 선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눅 8:9-15).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백배의 결실을 가져오게 됩니다.
2) 배교에 대한 경고 (4-9): 4. 이 구절부터 흔히 말하는 난해한 구절이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이 한번 빛을 받았습니다. 무언가 “아하!” 하는 깨달 음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하늘의 은사도 맛을 보았습니다. 고전 12:4-11에 열거되어 있 는 성령님의 은사들도 맛보고 성령님의 역사에 참여도 했습니다.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맛을 보았습니다. 어느정도 깊이 말씀에 참여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 맛은 보았습니다. 6. 그리고난 다음에 타락을 하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타락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마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없고 효력이 없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그런 사람은 다시 새롭게 되어 회개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 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몇가지 언급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죄는 다 용서받을 수 있는데 성령님을 훼방 하면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마 12:22-37). 예수님깨서 성령님을 통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귀신의 왕인 바알세물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또 마 10:32-33에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하실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계 22:19에는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생 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하는 것에서 제하여 버리실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세곳의 말씀은, 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권위를 공개적 으로 부인하면 구원의 대열에서 제외시키겠다는 말씀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 구절들에서, “사람이 예수님을 한 번 믿었더라도 그 구원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그 구원이 소멸될 수도 있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가롯 유다 같은 배교자가 있었고, 역사적으로도 배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면 요 10:27-29이나 롬 8:37-39 같은 말씀에 정면으로 대치가 됩니다. 칼빈의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로 반론을 폅니다. 첫 번째의 반론은, 한 번 믿는다고 하면서 이런 배교를 하는 사람들은 원래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히 6:4-6과 마 7:15-23에는 그 사람들이 예수 님을 영접했다거나 거듭났다는 기록이 없고, 그냥 그들이 했던 일들만 기록되었다는 사실도 지적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도 예수님의 이 름을 인용해 기적을 베풀 수도 있을 것입니다 (행 19:13-14). 저도 한국이나 미국에서 이런 의심이 가는 목사들과 믿음 좋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7-8절에도 채소와 엉겅퀴를 내는 땅은, 땅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9. 두 번째의 반론은 이 단락의 말씀들은 경고이지 이 편지를 받는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경고로 앞의 말들을 기록했 지 실제로 그들에게는 이보다 다 좋은 구원에 속한 것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 생각에는, 단순 경고 치고는 좀 지나치게 기술한 것 같고 전혀 가능성 없는 사건을 들어 경고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100%는 잘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만 아 실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어떤 사람의 행동과 말을 통해 추측할 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마 음에 영접하는 영접 기도를 하게 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 10:32-33, 요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