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1월 마지막 주, Thanksgiving day를 며칠 앞 둔 주일입니다. 올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를 되돌아보는 귀중한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한 해동안 제가 배우고 느낀 이야기들을 나누려고 합니다. 제가 예수를 알게 되면서 해 온 고민이 있습니다. 첫째는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둘째 구원받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찾아보고 나름대로의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열심’ 제가 매우 인상 깊게 읽었던 설교집 제목이기도 하고 오늘 제가 드리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부족하기만 한 저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모양이라도 갖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온전히 하나님의 단독 작품이듯이 말입니다.

1.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믿고 나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토요일에는 학생들끼리 모여서 한두 시간씩 기도회를 하기도 하고, 금요일에는 철야기도회에 참석하고 기도원에 올라가 나무를 붙잡고 기도하기도 했으며, 금식기도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방언과 신유은사를 받기 위한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런 다양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기도내용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었습니다. 좋은 대학가게 해달라는 기도, 번듯한 직장 가지게 해달라는 기도, 내 맘에 드는 배우자를 만나게 해 달라는 기도. 우리 교회가 빨리 많은 헌금을 모아서 예배당 짓게 해달라는 기도.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주로 내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있어서 ‘기도를 넣으면 복을 내려주시는’ 자판기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해 본 적도 없습니다. 개인별 성경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 ‘믿음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믿으면 구원받는다는데 도대체 믿는다는 게 무엇인가? 내가 영접기도를 한 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성경을 찾아보니 롬 10장 10절에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는데 영접기도를 했으니 입으로 시인한다는 조건은 만족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마음으로 믿는 것인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믿음’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1.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 2. <종교> 신앙 (2. 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ㆍ사랑ㆍ의뢰심을 갖는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꼬면서 말하기를 좋아하는 분들은 교회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믿는 것. 이성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믿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물위를 걷고, 오병이어사건 등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데 그렇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성을 포기하는 것, 맹목적인 것, 심지어 성실을 포기한 요행수를 믿음이라 포장하기도 합니다. 공부하지 않고 시험 잘 보기를 기도하는 것이 대표적이죠. 
목사님과의 새생명반 성경공부를 통해 믿음에 대한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을 받게 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을 단순히 동의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키고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의하면 믿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믿음이란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 혹은 기독교로의 개종을 위한 결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도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에 고민했던 것입니다. '행위'가 행동적 행위라면 '믿음'은 상태 혹은 결단하는 행위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행위의 종교가 되고 말겠지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바 '믿음'이란 인간의 어떤 결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허락하신 선물로서의 믿음입니다. 구원과 믿음은 우리에게 원인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입니다. 우리가 독생자를 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거기에 원인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우리가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행위나 결단을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믿음이며 받아들이는 것, 즉 영접하는 것조차 우리가 결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믿음은 애초에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취소되지 않으며, 구원도 취소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열심 때문입니다.

2. 구원받은 이후 무엇을 해야 하나? 
예수 믿고 나서 믿음생활, 더 정확히 말하면 교회생활에 열심을 내면서, 이런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 ‘이제 너는 주를 위해 무엇을 할 거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보답해야 하는데 너는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이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나를 오지에 선교사로 보내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보답은 해야 하는 데 선교사로 가기는 싫었거든요.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한 목적을 위해, 예를 들어 봉사하려고, 혹은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우리를 구원하셨을까요? 마치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내기 위해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만들고, 청소를 위해 청소기를 만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구원하셨을까요?  
출애굽기 공부를 하면서 더욱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과 8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이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겠다'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기에 꺼내는 것이지 꺼내 놓고 내 백성을 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백성을 내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겠다고 3장 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내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애굽을 벗어나는 일이고, 그리고는 가나안을 향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출애굽 사건은 '출애굽=가나안 입성'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출애굽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 속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은 가질 수도 있고 못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홍해를 건너기까지 하나님이 단독으로 일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 4장을 읽어보시면 나이 80세 된 노인 모세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얼마나 많은 변명들을 늘어놓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영웅 모세를 생각한다면 있을 수도 없는 치졸한 변명들로 일관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려서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모든 애굽인과 애굽인에게 속한 동물에게서 처음 태어난 생명들을 거두시면서 까지 마침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홀로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의 병거와 군사들을 홍해에 수장시켜버리십니다. 이렇게 홀로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때 먼저 우리를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셔서 구원해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구원을 상징합니다(고전 10:1-2)
문제는 가나안을 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납니다. 가나안 들어가는 일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거역하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못하게 됩니다. 홍해 나올 때 보인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해서는 그냥 놓아두시지만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거절하자 하나님은 억지로 밀어 넣지 않고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따라 광야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렇다고 홍해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중 다시 애굽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없습니다. 이처럼 한번 얻은 구원은 취소되지 않지만 우리가 가나안까지 이르는 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까지 성화되어 가는 일에는 우리의 책임이 따릅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홍해를 건넜을 때 이스라엘은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리고 수르광야를 지나 신광야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아말렉과 싸움이 벌어집니다. 출애굽을 하지 않았으면 아말렉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말렉은 애굽이 아니라 신광야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으로 살고 있는 한 아말렉과의 전투는 필요 없었습니다. 출애굽을 하자마자 싸우는 것이 아말렉과의 싸움입니다. 지금껏 죄 안에서 살 때에는 나와 나의 본성은 사탄과 도무지 충돌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의 자리와 원리를 바꾸었을 때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영접 후 맨 처음 부딪치는 현실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갈등과 회의입니다. 분명히 홍해를 건넜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내 자신이 가장 큰 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어서 어디로 데려가시기로 했다구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에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그럼 가나안 땅에서는 무엇을 하죠? 가나안 땅은 어떤 곳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원주민을 몰아내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곳입니다. 원주민이 누구입니까?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 가나안 족속, 나안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자들입니다. 죄를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고 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현재 우리 식으로 이야기 하면 우리 안에 옛사람을 몰아내는 싸움을 하는 겁니다. 죄를 거부하는 겁니다. 죄를 몰아내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광야에서도, 가나안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원하는 싸움을 하느냐 안하느냐로 집중되어야 합니다. 매일의 싸움은 내가 구원을 얻었느냐 못 얻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오늘 하루를 하나님께 맡기느냐 안 맡기느냐의 싸움이어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육체를 좇아 살면 성령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싸움은 이 싸움이어야 한다. 매일 이 싸움이 있는 것이지 큰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 오늘 하루의 생애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 순종하느냐 안하느냐의 싸움이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와 부딪히고자 하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신자로서 부딪혀야 합니다. 물론 실수가 많을 것이고 처음에는 싸우면 지고 실패할 때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승부가 이미 결정 난 경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시작이었습니다. 시작해서 바로 완성되지 않고 완성의 길을 향하여 지금 닦여가고 있는 과정을 사는 것이 신자들의 삶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장해 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헌금과 기도와 성경공부와 전도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바른 신앙은 내가 부대끼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일에 보답하기 위해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여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 결과로 복음을 전하고 봉사를 하는 것이 옳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근본이 달라야 합니다.
자녀들중에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아이가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저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 아이가 의사가 되어서 치료받게 될 환자에게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자녀가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환자의 생명을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고, 본인이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녀가 의사가 되어 일한다는 것이 저에게 있어서 환자 치료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없듯이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셨던 하나님께서 나를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나를 통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내가 복음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그 외에 무언가를 경험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3.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하나?
성경을 읽는 방법이 다양합니다. 저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책 순서대로 읽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성경 읽는 방법을 대략 통독, 정독 두 가지 정도로 구분됩니다. 우리가 주로 성경읽는다고 이야기할 때는 통독을 이야기하는 것이구요. 성경을 연구할 때 읽는 방식이 정독입니다. 그 외에도 수도사들이 사용하는 성독이라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나씩 말씀드려 보려고 합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읽기를 말할 때는 일반적으로 통독(通讀)을 말합니다. 읽는 내용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빠르게 읽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을 감 잡을 수 있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숲을 보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정독(精讀)입니다. 읽는 내용을 깊이 따져가며 자세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밀림에서 나무 하나 하나를 세밀하게 관찰하며 연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 준비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단어, 구절을 구석구석 살펴보는 방법입니다. 주석이나 성경사전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조명하심 하에서 읽는 성독(聖讀)이 있습니다. 묵상하며 읽기를 말하기도 합니다. 수도사의 전통 안에서 행하는 독특한 수행법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영성훈련으로서의 성경읽기입니다.
통독하는 방식도 성경을 구성된 순서대로 읽는 방법, 역사 순으로 읽는 방법(연대기), 맥체인, 파노폴리아(전신갑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용하는 성경은 문학적 성격에 따라 배열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성경을 순서대로 읽으면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 등이 서로 연결되어 이해하기 어렵고 역사적인 흐름을 이해하며 읽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바울 서신들은 역사서인 사도행전과 깊은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로 구분되어 있어서 역사적인 연관성을 연결시켜 읽고 이해하는 데 많은 애로를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여 성경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한눈에 성경 전체의 흐름을 파악, 더 생동감 있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이 연대기 성경읽기입니다. 성경을 그 말씀이 기록되던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에 따라 순서대로 배열, 역사적 흐름을 따라 읽어 가므로 성경을 더 깊고 명쾌하게 알 수 있게 할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기준에 따라 다양한 연대기 성경읽기표가 있습니다. 연대기성경이 별도로 판매되기도 합니다. 
맥체인 성경읽기표는 19세기에 스코틀랜드의 Robert Murray M'Cheyne 목사가 성 베드로교회의 성도들의 성경읽기를 위해 만든 방법으로 1년에 구약은 1회, 시편과 신약은 2회 통독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구속사를 창조의 시작, 민족의 갱생, 그리스도의 탄생, 교회 탄생으로 구분하여 비교하며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파노폴리아는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과 신약 이렇게 4부분으로 나누어 1년에 2독할 수 있도록 구성한 성경읽기 계획입니다. 
저는 주로 스마트폰을 사용해서 성경을 읽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스타일에 적합한 도구와 읽기 방법을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성경공부의 즐거움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다시 이렇게 성경공부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무엇이든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다 보면 가끔은 ‘이런 질문을 해도 될까? 엉뚱한 질문인 것 같은데. 이런 질문에도 답해 주실까? 이런 질문은 답변하기 곤란할 텐데 괜찮을까?’ 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그런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답변이 주실 것이라는 신뢰가 있었거든요. 같이 공부하는 분들이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체계적인 공부의 필요도 느꼈습니다. 동일한 성경구절을 놓고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를 결정하려면 조금 더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좀 더 성숙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다음에 여러분과 다시 말씀을 나누는 기회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우리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내가 부대끼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나그네의 짐은 가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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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어설교
    Korean Sermon
  2. 영어설교
    English Sermon
  3. 목사님과의 대화
    Dialogue with Pastor
slogan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장 58절)

"Therefore, my dear brothers,
stand firm.
Let nothing move you.
Always give yourselves fully
to the work of the Lord,
because you know that
your labor in the Lord is
not in vain."
(I Corinthians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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