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영적 예배

로마서 12장 1-2절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성탄절과 더불어 부활절을 매우 비중있는 절기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믿고,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이는 우리의 구원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다시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이 우리가 믿는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을 통해서, 죄인이었고 원수이었던 우리를 너무 나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의 말씀입니다. 모두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제가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수 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사도 바울의 신학 강의, 곧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2장부터 16장은, 복음을 깨달은 성도의 아름다운 영적 생활 원리 입니다.
11장까지가 우리 믿음의 교리라면, 12장 부터는 우리가 믿는 교리를 실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쳐 주는 아름답고도 소중한 말씀입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복음의 원리를 듣고 이해한 성도들은 큰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성도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고, 결국에는 승리와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12장을 시작하면서, 성도들에게 도전적인 주문을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해서, 또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마치 잠시의 나그네 삶과 같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되는데로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뵐 날만 기다리면 된다는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지 말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개인과 교회와 세상 안에서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복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문합니다. 믿는 자들의 승리하는 영적 삶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입니까?

주위에서, 자신의 영적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영성이 풍부하다는 교회에 참석하고, 방언의 은사도 원해 보고, 또 부흥회에 나가서 밤을 지세우기도 합니다. 통성기도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부흥회 인도자의 인도에 따라 몸을 맡겨 보기도 합니다. 잘만 하면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뭔가 부족합니다. 당장은 뭔가 느껴지는 것 같고, 또 ‘참으로 은혜를 많이 받았다’라고 말들은 하는데, 하루 이틀이 가면 다시 만족감이 떨어지고, 다시 마음 한구석이 다시 공허해 집니다. 더 충격적이고 강한 자극이 계속해서 필요합니다. 뭉클한 뭔가를 경험하지 못하면,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이어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지 않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한 마디로, 목마름과 갈급함은 있는데, 시원한 느낌은 잠시 뿐이고, 평안함은 없습니다.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의 모습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격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무엇을 계속 구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고,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승리는 우리가 무슨 새로운 은사를 구하고 받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에 감사하고 할 수 있는만큼 다른 형제 자매들을 위해 내어 주고 나누어 주는 데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승리는 뭔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뭔가를 계속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교회를 찾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게 해준다는 교회를 찾아 가기도 합니다. 부대시설이 잘 되어 있고 보기 좋은 건물에 있는 교회를 찾기도 하고, 뭔가 나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 줄 수 있는 교회를 원하기도 합니다. 이런 자신에게 이상적인 교회, 뭔가를 채워주고 해 줄 수 있는 교회를 찾기만 하면, 영적으로 성장하고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믿음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고 성장하게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은사나 이적, 또는 외형적인 교회 건물에서 찾으면 잘못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삶, 즉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은 뭔가 특별한 은사를 바라고 얻어서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가진 것을 내어 줄 때에 자동적으로 오는 것이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12장을 시작하면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12장 1절의 말씀은 단순한 권고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면 좋고 안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믿는 성도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이기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기억할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 우리가 새생명을 받은 것은 스스로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노력을 해서도 아니고, 능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니까, 진짜 우리가 노력하면 뭔가 하나님께 해 드릴 수 있지 않을까?하고 짐작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은 홀로 거룩하시고 높으신 분이십니다. 홀로 온전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인간적인 능력으로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o 시편 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죄인이었던 우리를 당신의 크신 은혜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뭔가를 해 드리고 싶은데, 이미 완전하신 하나님께 보잘것 없는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정한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참 예배를 드리는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3에서 다음과 같이 참 그리스도인을 정의 합니다.

o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o KJV - For we are the circumcision, which worship God in the spirit, and rejoice in Christ Jesus, and have no confidence in the flesh.

한글 성경에서는 ‘성령으로 봉사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성령안에서 예배드리며’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이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안에서 예배드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며, 썩어질 육체로 이루어가는 이 세상의 영달에 미련이 없는 성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선언합니다.

o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는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아론과 같은 대제사장이며,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인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를 십자가의 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거룩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생각하면서 잘 차려입은 성가대나 음악과 혼돈하지는 않습니까? 예배 가운데에서 성도들이 모두 함께 노래로 찬양드리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니다. 그러나, 성가대와 연주단이 예배의 본질은 아닙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경배를 드리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형식에만 치중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 공연입니다. 자칫하면, 인간의 기준에서는 봐줄 만한 공연이 하나님앞에서는 잘못된 제사일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경배는 주님에 대한 모욕이며 정죄의 대상입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잘못된 예배를 드렸을 때의 결과를 기억하십니까? 여화와의 불이 나와서 그들을 집어삼켜 버렸습니다.

o 레위기 10: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한 다른 불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NIV 성경에서는 unauthorized fire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레위기 9장에서 아론이 드린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셨는데, 아론의 아들들이 드린 예배는 정죄함에 이르고 맙니다. 잘못된 경배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잘못을 이스라엘 민족이 처음 저지를 것이 아닙니다. 애굽땅에서 벋어난 후,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있는 중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잘못된 경배를 저지르고 맙니다.

o 출애굽기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잘못된 경배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너무나도 크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모두 진멸하시려 하십니다. 만약 모세의 간구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그 자리에서 모두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허락받지 않은 불과, 출애굽기의 금송아지는 잘못된 신앙, 잘못된 경배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또 이러한 잘못은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며, 정죄의 대상이고, 그 결과는 죽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오늘날의 경험이나 이적 중심의 체험중시 풍조는 잘못된 경배의 일례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삼위일체이신 성령님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개개인의 감정적 순화 (카타르시스)를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성령님에게 오라 가라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높으시고 모든 권위를 가지십니다. 우리 피조물이 성령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삼위일체이신 성령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대다수의 성도들은 옳바른 교리에 근거하여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성도들을 잘못된 경배로 이끄는 거직 교사들이고, 또 성도의 믿음을 자신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 이용하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12절에서 나타난 거짓 교사들의 특징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동기는 개인의 탐심이며 영달입니다. 성직자임을 내세워 일반 대중으로부터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성적 욕심을 채웁니다. 그들은 간사하고 부정한 말로 속임수를 일삼습니다. 그들은 세치 혀로 어떻게 사람을 기쁘게 하는지 알고 있고, 아첨을 하며, 또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영적 체험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치유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가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종교개혁의 대부인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어떤 사람이 자신이 성령님의 감화를 받았다고 자랑하지만, 그가 하는 말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면, 어떤 말을 하던지 간에, 그 사람에게 당신이 지금하고 있는 것은 악령의 역사라고 말해주십시오. (Martin Luther, Luther’s Works, vol. 23, 173-74)
•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모든 것은 분명히 악령으로 부터 온 것입니다.( Martin Luther, Luther’s Works, vol. 36, 144)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 새로운 복음이 영원토록 완벽해지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로 (초대교회가 세워지기까지의) 일정 기간 동안 행하여진 치유의 은사는 다른 모든 기적과 더불어 사라졌습니다. (John Calvin,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1536 ed., trans. Ford Lewis Battles, Grand Rapids: Zondervan, 1986, 159)

우리 신앙의 선배이요 영적 지도자인 이들의 간절한 고백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 체험중심 은사주의 신앙이 문제입니까?


첫째, 성경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체험 중심의 은사주의 신앙을 고백하는 분들은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시길…”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해 주셨다는 것만으로 기독교의 모든 교리와 성경의 말씀은 무시해도 되는 것들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말에 의구심을 표하는 성도는 믿음이 없어서이기 때문이라고 비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말씀보다도, 자신이 꿈에서 본 것이나 묵상 중에 떠오른 생각이나 등골에 짜르르 흐르는 전류같은 느낌이 더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도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받아드리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몇 구절의 말씀을 여기 저기에서 가져와서, 앞뒤 문맥 다 자르고, 자기를 변호하고 합리화 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하는 옳바른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둘째, 검증이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을 통한 검증입니다. 그러나 체험 중심의 신앙은 개인적인 체험이나 감정 또는 느낌만이 필요합니다. 객과적인 검증이 필요없고, 또 검증할 수도 없고, 검증 해서도 안되는 신성 불가침입니다. 다만, 자기 확신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에 의문을 표시하면 믿음이 약하다던가 성령의 은총을 받지 못했다고 배척하고 비난 합니다. 치유 은사 집회에 참석하고, 기부도 하고 열심히 기도도 했는데… 치유를 못받았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집회를 인도한 치유의 은사가 있다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몸이 아픈 사람의 믿음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좋은 비즈니스 모델이 어디 있겠습니까? 절대 손해 안봅니다. 안되도 그만입니다. 병 안낳아도 됩니다. 내탓이 아니고, 성령님 탓도 아닙니다. 바로 당신의 믿음이 적어서 성령님이 치유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땅집고 헤엄치기 비즈니스 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검증이 안됩니다. 믿음이 모자라서라는데 어떻게 무슨수로 믿음을 정도를 검증한다는 말입니까?


셋째,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원리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일상속에 역사하시는 것이지, 어느 한순간에 불꽃으로 내리 꽂히는 방법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강림과 초대교회의 기적들은 초대교회를 위한 주님의 배려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성경으로 자리잡은 이후에도 이러한 초자연적인 기적에만 의존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정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 결과를 보면 뭔가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Benny Hinn과 같이 개인의 영달을 목적으로 치유 사역을 선전하는 사람이나, Kenneth Copeland처럼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사역자는 거짓일 가능이 높습니다. (A Question of Miracles이라는 다큐멘터리 필름이 있습니다. HBO에서 Benny Hinn의 부흥회에서 치유받았다는 사람들을 1년간 추적한 필름입니다. 결론은 한명도 기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믿는자의 구원이지, 썩어져 없어질 육체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성령님을 맘대로 부려서 병을 치유하고 부자가 되게 해 준다는 주장은 ‘성령모독’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성령님을 마치 자신의 수족처럼 여깁니다. 자신이 기도하면 성령님이 오셔서 불치병을 치료하시고 장님을 눈뜨게 한다고 말합니다. Benny Hinn은 Fire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뒤로 쭉 넘어집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 어느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성령님을 감히 누가 오라 마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Fire라고 외치면, 총알이 발사되듯 성령님의 불꽃이 날아가서 병자들에게 꽃힙니까? Benny Hinn은 여러명을 한꺼번에 넘어뜨리니까, 성령님을 자동소총으로 발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이단적 발상입니다.
(참고로, Benny Hinn은 이 세상의 종말을 두번이나 예언했으나 못맞췄습니다. 한번은 유리겔라처럼 TV를 통해서 치유를 한다고 주장하며 시청자들에게 TV에 손을 올려 놓으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Benny Hinn의 기부금 요청 우편물에는 $10,000, $5,000, $2,000, $1,000이라는 금액만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생산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의 일부 목회자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이런 거짓 선지자와 손을 잡고 오히려 앞장섭니다. Benny Hinn의 광고전단에 이름을 올린 분들 중에는 한국 기독교 안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또 이단 시비에 휩싸인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 교회의 씁쓸한 모습입니다. 이런 목회자가 인도하는 예배가 과연 성령안에서 드리는 참 예배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신명기 28장은 이러한 잘못된 경배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경고의 말씀을 보여 줍니다.

o 신명기 28: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59.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잘못된 경배는 정죄의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재앙으로 정죄하시고, 이는 자손에게 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지 않는 죄인을 결코 봐주고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예배가 도대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입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때에야 진정한 참 예배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핵심어는 ‘산 제물’ 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물을 제단에 가져와 반으로 쪼게 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레위기 9장에서 이에 관한 규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스스로의 몸을 제물로 바치신 단 한번의 십자가 제사로 인하여, 더이상 양이나 비둘기 같은 제물이 필요가 없어 졌습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고,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2장의 말씀입니다.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o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신령한 제사는 신령한 제물을 필요로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자신이 바로 신령한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이후로는 더 이상 죽은 제물은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 자신을 신령한 ‘산 제물’로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산 제물로 드릴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제대상 위에 반으로 쪼게져서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썩어질 육체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이유도 없고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우리를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은 곧 우리의 인생을 주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순종과 헌신입니다. 시편 37:5편에 나온 말씀, 성도님들께서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o 시편 37: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우리가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믿고, 순종하고, 헌신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성도의 몸은 곧 성령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성령님의 가르치심에 순종하여 내어 드리라는 말입니다. 성령님께 Surrender한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순간, 우리의 속사람은 이미 새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새것이 된 속사람과 더불어, 이세상을 살아가야 할 육체마저 하나님께 바치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우리의 겉사람을 내어 드린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상의 것들에 길들여진 육체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o 로마서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은 새것이 되었지만, 인간의 육체는 여전히 죄의 지배하에 놓일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어지는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죄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신의 육신에 대해 고백합니다.

o 로마서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육체의 욕망과 싸우는 사역자의 고민을 읽을 수 있습니다.

o 고린도전서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육체에 거하는 인간인 이상, 아무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민은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고민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편한 것을 추구하고, 세상적인 쾌락을 즐겨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에도 재물이나 시간이 들것 같으며 머뭇거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멈뭇거림없는 순종임을 알고, 우리의 몸을 온전히 드릴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길 간구합니다.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진정한 제사를 위해 우리를 산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늘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의 마음은, 진리를 보는 분별하는 능력,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지혜의 은혜, 세상에 살면서 부딛히는 문제들을 결정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순종하는 자세를 뜻합니다.
왜 성도의 마음이 늘 새로워 져야 합니까? 우리의 속사람은 새것이 되었고, 또 우리의 겉사람도 온전히 드리기 위해 늘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세대에 굴복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대는 악함이 만연하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o 요한1서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만약 우리의 마음을 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악함에 물들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상적이고 물적인 악함을 멀리 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지키겠다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늘 새롭게 할 수 있습니까? 골로새서 3장의 말씀을 함께 읽어 보기를 원합니다.

o 골로새서 3:18.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바로 말씀이 정답입니다. 늘 새로워 지는 마음은 곧 늘 말씀과 함께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할 때, 우리의 마음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늘 새로워 질 것을 믿습니다. 이 세대의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할 지혜와 지식이 성경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부흥회에서 느낀 감동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등골을 스치고 지나가는 짜릿한 느낌이 아닙니다. 바로 말씀이 정답입니다. 말씀으로 올바로 서지 않은 성도는 이 세대의 악함에서 벋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재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우리가 당신께 합당한 경배를 드리고, 또 우리의 세상적 자아를 버리고 우리의 삶을 당신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산 제물로 내어드리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그리 큰 것을 원하시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은, 우리의 결정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것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주님,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홀로 높으시고 홀로 모든 영광을 가지신 주님께, 우리가 더 드릴 수 있는 세상적 제물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오직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이것도 우리의 노력이나 인간적인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가르치심과 하나니의 거룩하신 말씀에 더욱 순종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고 찬양드립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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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어설교
    Korean Sermon
  2. 영어설교
    English Sermon
  3. 목사님과의 대화
    Dialogue with Pastor
slogan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장 58절)

"Therefore, my dear brothers,
stand firm.
Let nothing move you.
Always give yourselves fully
to the work of the Lord,
because you know that
your labor in the Lord is
not in vain."
(I Corinthians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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